그 집은 수상하게 저렴했다
혜림2025-11-27 20:48

작년부터 올해 월세 70의 셰어하우스 비스무리(좁다, 새 건물, 딸려있는 옵션이 많다)한 곳에 살다가 너무 비싸고 좁고 룸메들이 시끄러워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새 집을 찾아 나왔다. 볼거면 8월 말부터 집을 봐야했는데 그때 그냥 덥고 돌아다니기 싫고 일이 바쁘고(라는 핑계..) 어른행위(부동산을 계약한다 등) 하기 싫어서 서 직방과 피터팬만 보며 미뤘다. 그러다 10월 초 추석 직전에 몇군데 돌고 가계약했다. 2025년 10월 말에 이사를 들어왔으니까 딱 한달 조금 넘었다. 

 

새로 이사온 집은 원래 살던 곳에서 정말 가깝고, 창문이 크고, 남향이고, 주변에 병원과 편의점과 지하철역이 있고, 큰길가라 안전하지만 바로 옆 건물들도 빌라고 앞에는 공원이 있는... 보증금이 5천에 월세가 30인 곳이었다. 보증금이 비싸지만 월세가 굉장히 저렴했다. 보증금은 돌려받을 돈이니까...! (이랬는데 2년뒤에 전세사기 당했다고 글쓰게되면어떡하지)

서울에서 굉장히, 수상할정도로 저렴한 곳에 들어오게 됐다는 말

 

여기서 수상함을 더해보자면 원래 살던 세입자는 남자 한 명으로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사정이 생겨 일찍 나가버렸다고 부동산 주인이 말해줬다. 이유 없이 저렴한 건 아니라 오래된 건물이었고. 옵션도 별로 없었는데, 특이한 게 침대도 책상도 없는 집에 옷장이 있었다. 오래된 옷장이... 말고 다른 특이사항은 없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한낮의 햇빛이 싹 들어오는 모습에 반해 가계약 걸었다. 그것만 아니라도 이런저런 입지가 좋았고... 이거 귀신에 홀린 사람의 특징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긴 했다. 이사 전에 청소니 짐옮기니 하면서 이래저래 왔다갔다 할때마다 햇빛 받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 싹 사라지던데?

 

여기까지 쓰고 생각난 특이한 점 하나 더. 

전에 살던 세입자 남자랬잖음 주방 찬장 구석에 콘돔박스가 한무더기있던데 이거 버리긴 버려야하는데 손대기싫어서 아직 냅두고있음

 

여튼 이렇게 어디 인터넷 괴담에 나올 것 같은 이유없이 저렴한 수상한 집에 살게 되었고

정말 이유 없이 저렴한 집은 없다는 걸 깨닫고 있다

 

사실상 이제부터 본론

 

과연 이 집이 저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귀신이 나옴

2. 벌레가 있음

3. 집주인이 부자

4. 사건이 있었음

5. 기타

 

정답은 2 (3도 있긴 한데)

 

...

...

빌드업 없이 말하자면 집에서 빈대가 나온다. 위에 썼듯 이 집은 오래된 건물이고 근처에 공원이 있어 벌레가 나올 것은 각오했지만 빈대는 각오 못했어서, 사실 매일 밤마다 침대에 눕는 것이 두렵다. 밤이 되고 잠에 들면 그것이 나온다... 들어올 때 모든 가구를 새로 들였는데, 나무도 없고 전부 철인데. 오래된 나무 옷장 빼고. 아마 옷장이 문제일 것이다. 옷장이 초청하지 않은 불청객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따지자면 내가 불청객인 쪽이겠지만.

 

여튼 첨에 설마 빈대겠어, 에이 설마, 하고 2주 정도 병원가서 벌레에 물렷더염 하고 약을 받아먹었다. 그랬더니 많이 가라앉고, 또 많이 물려서... 또 병원에 갔더니 아직도 안 가라앉았냐며, 그러면 벌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합리적이었다. 나도 집에서 벌레를 보지 못했으니까. 집먼지 진드기, 혹은 모기(실제로 잡긴 함), 그냥 계절 알러지, 환절기라 건조해서 등등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순간에도 팔과 다리는 간지러웠다.

 

그리고 잡았다. 어느날 잡아버렸다. 정확한 형태는 못 봤지만 항진시트 밑으로 기어다니는 검은 형체가 있었다. 잡았더니 당연히 피나오고, 침대에 있으면 뻔하다. 뻔하지만 부정했다. 집먼지 진드기일까봐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고 모기일까봐 모기장도 정비하고 11월에 홈키파도 들이고 그랬는데 (아마도) 빈대라니. 허망했다. 그래도 혹시나 했다. 제발 아니었으면 했다. 인터넷에 도는 빈대 특: 일자로 문다. 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대 밑에는 인터넷에 도는 빈대 특: 모서리에 검게 배설물 자국이 남는다. 의 그 자국이 남아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벌레랑 같이 살게 되었다. 아직까지 부정하고 있었지만. 얼마나 싫어하냐면 옛날에 트위터에 빈대플로우 돌았을때 빈대를 단어뮤트 했었다. 그런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해결을 해야지. 언제까지 물리고 살 수 없다. 

 

일단 바로 매트리스 청소 업체와 세스코를 불렀다. 매트리스 청소는 비싼거 덜비싼거 있던데 돈없으니까 덜비싼걸로 했고 세스코는 그냥 벌레 진단이랑 빈대 무료 진단으로 신청을 했었다. 둘 다 밤에 문의했고 청소 업체는 다음날 낮에 온다고 해서 ok했고 세스코는 영업시간에 상담사가 전화를 준댔다. 그날 밤은 뜬눈으로 바닥에서 잤다. 님들이라면 이 상황에 침대에서 잘 수 있겠나요. 나는 못 잠. 실제로 그 날은 벌레에 물리지 않고 등만 배긴 채 눈을 떴다. 눕기 싫어서 새벽까지 놀았다. 아마 레포를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수요일. 눈을 떠서 마침 월세날이 되어 월세를 넣고 집주인에게 집에 빈대가 나온다고 문자를 넣었다. 답장은 없었다. 매트리스 청소 업체에서 사람이 왔다. 사실 이쪽은 벌레를 잡아주는 건 아니고 그냥 먼지 청소 싹 해주고 벌레 방지용 연기 뿌려주는 정도였다. 그래도 깨끗한 매트리스 좋으니까 돈 아깝지 않았다. 실제로 찝찝한 기분 찝찝한 느낌이 많이 사라짐. 앞으로 주기적으로 신청하려고요. 사람도 친절하셨다. 매트리스 청소를 받는 도중에 세스코에서 전화가 왔다. 

- 세스코 진단 신청하신 분 맞으시죠

- 네 빈대가 아마도 있는것같아서 확인하려고요

- (목소리 심각해짐) 빠른 시일은 금요일에 가능한데 괜찮으신가요

- 네 괜찮습니다.

사실 저 '금요일'이라는 거 말이지, 원래 학원 개강일이라 안괜찮았는데, 내가 갑자기 취직하게 되어서 정말 '괜찮아'졌다. 사족을 쓰다면 저 주에 통화를 상당히 많이 했다. 다음주부터 출근하라고 하고 마비노기 쇼케이스도 당첨됐다고 하고 학원 개강일 전에 이거 그거 저거 준비하라고 안내받았고 매트리스청소신청하신 분 맞죠 네 맞아요 세스코 신청하신 분 맞죠 네 맞습니다 집주인하고 통화하고 부동산 할배하고 통화하고

 

매트리스 청소를 받고, 아직 빈대를 실물로 본 것은 아니기에 아니라고 믿고있었다. 그렇게 믿고싶었다. 벽과 옷장이 문제일 것 같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들어 벽과 옷장에서 침대를 살짝 떨어트려뒀다. 그리고 깔끔한 매트리스에 누워 쾌적하게 폰을 하다, 문득 벽을 보고 싶어졌다. 그것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침착해야했다. 속도가 빠르지 않다. 책상 위에 휴지를 뒀다. 한번에 잡으면 된다. 잡을 수 있다. 잡았다. 불을 켜고 사진을 찍었다. 앞면과 뒷면. 빈대떡이 왜 그런 이름인지 알 것 같았다. 오히려 실물을 보니 코즈믹호러적 두려움은 사라졌다. 나에게 남은 것은 지지 않겠다는 마음 뿐이다.

 

금요일이 되었다. 그날은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병원에 가서 또 약을 받고 주사를 맞았다. 다이소에 가서 나프탈렌을 샀다. 벌레 막는 건 다 산 것 같다. 행동 양식이 집에 귀신 나오는 걸 발견한 세입자가 무당한테 찾아가고 십자가 두고 소금 뿌리는 것 같았다. 귀신과 빈대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런 게 모두 헛수고라는 점이다. 귀신은 십자가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빈대도 나프탈렌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세스코 홈페이지부터 '빈대는 완전 방제가 되지 않습니다' 라고 적혀있다. 세스코도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데? 여튼 나간 김에 우체국도 갔다오고... 돌아왔더니 오피스텔 앞에 세스코 차가 와있었다. 저 혹시 오늘 세스코... 저거든요... 하고 같이 들어갔다. 무료 진단이라 짐은 간소하게 오셨었다. 

- 빈대라고 하셨죠?

- 네 자꾸 물려서요.

- 혹시 실물은 못 보셨나요? 

- 아 그게... 잡았어요. 통화한 이후에.

- 버리셨겠죠?

- 네 그런데 사진을 찍었어요. 

- 아 그러면 확인이 쉽겠네요. (엘리베이터 내리며)

- 네 보여드릴게요 (집에 들어서며) 여기 있어요.

- 아 이건 곤란하네요 (진짜 곤란한 표정으로 말하심)

곤란한 표정으로 침대 밑을 이래저래 보시고, 사실 선명히 찍혔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검사는 간단히 끝났다. 침통한 표정으로 빈대일 것이라고 진단을 내려주셨다. 나도 침통했다. 의사가 치료할 수 없는 병과 세스코가 쫓아낼 수 없는 벌레. 원래 있었던 오래된 옷장과 냉장고가 문제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냉장고는 버릴 수 없었고, 옷장은 집주인에게 얘기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빈대의 특징을 들었다. 번식이 빠르고, 밝을 때 숨어있다가 어두워지면 인간의 피 냄새를 맡고 올라온다. 지능이 높다. 침대를 통해 올라올 수 없다면 벽을 기어다니다 인간에게 떨어진다.(무슨 영화에 나오는 괴생물체 아냐 이거?)

 

더 무서운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곤란해하시던 직원분이 더 곤란한 표정으로 빈대 퇴치 프로그램은 가격이 조금 비싸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모두 들으면 놀란다고 하셨다. 나는 머리속에서 홈페이지에서 봤던 진단에 11만원 든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서 '아 네, 홈페이지에서 봤어요. 11만원...' 이게 퇴치 가격인줄 알았다. 이정도면 할만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셨다. 직원용 단말기를 꺼내더니 뭔가 계산하셨다.

5평에 (약) 200만원.

200만원이었다. 200만원... 200만원이 어딨어? 나 한달전에 이사왔는데. 여러분, 5평에 200만원입니다. 잘 알아두시고 비상 벌레상황에 대비해 200만원은 모아두세요. 이걸 하라고는 안 하셨다. 일반 방제도 30~40 선에서 있다며 알려주셨다. 일단 나는 집주인에게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분은 이런 경우를 자주 봤는지, 집주인에게 연락한다면 100중 90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10중 5가 조금 내주고, 4는 반반 내자고 하고, 1퍼센트만 전액을 내준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1퍼센트의 기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별개로 수요일에 집주인한테 문자넣고(답 없어서 금요일에 세스코 불렀으니 그때 말씀드린다고 한통 더 넣어뒀음) 부동산 할배한테도 얘기했는데 '처음 듣는다' '그럴리가 없다' '알아서 해야지 연락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부동산 할배의 호칭이 부동산 할배가 된 이유다. 그렇기때문에 집주인에게도 별로 기대하지 않고 통화했다. 안녕하세요오 저 무슨무슨오피스텔 삐리리호 세입자인데요오 / 아 그 최근에 들어온? / 네네... 빈대때문에 문자를 드렸었는데 세스코가 다녀와서 빈대가 맞는 것 같다고 해서요오 / 그럼 처리해야지 / 네 근데 좀 비싸서요오 / 얼마길래? / 200만원이요오 / ... / ... / 근데 그 빈대가 방제를 해도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 네네...ㅎㅎ 

한 30~40이면 내줬을 것 같은데 200은 쎄지 역시

옷장을 빼기로 하고 (와중에 새로 사준다는 말은 없음 사준대도 안받았을 것 같긴 해 나 지금 안을 확인할 수 없는 가구 공포증 생겨서) 통화는 끝났다. 해결된 건 없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여차하면 200, 써야지! 다행히 취직했고 월급이 200을 간신히 넘는다. 응...! ㅋㅋㅋㅋㅋㅋ 한달 돈 안받은 셈 치면 됨..!!!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 일이 지난주쯤 있었고 이번주부터 출근해서 바빴다. 오늘 아침에 받은 약이 다 떨어졌다. 아마 토요일에 새로 약을 받으러 갈 것이다. 이상하게 그 사이에 빈대 물림이 심하지 않았다. 왜일까...

1 세스코가 왔다간것만으로 기강잡혔다

2 매트리스청소하고 침대 벽에서 떼어놓고 모든 이불 세탁소에 맡겼다오고 나프탈렌 곳곳에 두고 에탄올 뿌려대고 이불 밑에 하나 더 깔고 자고 그런 나의 쇼가 통했다

3 물리는 건 물리는 거고 약 먹어서 덜 간지럽고 덜 올라오는거다

아마 3이겠지만... 근데 1이나 2면 좋겠다... 돈도 돈인데 걍 물리기싫어 간지러워 약먹으면 술도못마시고 아침챙겨먹어야해.

 

...

여튼 이게 트위터에 소상히 쓰지 못한, 그러나 알 사람은 알 근황입니다...